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OB 베어스 (문단 편집) == 창단 및 연고지 결정 과정의 진실 == 1981년 [[전두환 정부]]가 프로야구 리그 출범을 기획하자 [[두산그룹]]은 프로야구단 창단을 꿈꾸게 된다. 두산의 원래 목표는 수도 [[서울특별시]]를 연고로 하는 프로야구단 창단이었다. 여러 길을 돌고 돌아 1985년에서야 서울에서 베어스의 홈경기를 치르며 목표를 이루기는 했지만 이 목표에 이르기까지 3년 내내 상당한 진통을 겪어야 했으며 21세기에 와서도 소위 '충청 베어스' 내지는 '[[세입자]]'라고 조롱 당하는[* 사실 베어스의 서울 연고지 히스토리를 날조하고 조롱하는 이들은 [[LG 트윈스|같은 지붕 아래 옆방]] 팬덤 중 일부 소수 악질이다. 다만 이 팀의 극성 팬덤도 마찬가지로, MBC의 서울 연고 우선권이 널리 알려진 후에는 원년부터 이어온 MBC-LG 프랜차이즈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KBO 역사를 왜곡하는 등 서로 간에 피차 낯부끄러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 일까지 벌어졌다. 사실 두산은 대대로 수도권에 연고를 둔 기업이었기에 서울 연고팀을 맡을 자격이 충분하고도 남았다. 두산의 창업주인 매헌 [[박승직]]은 서울 근교 [[경기도]] [[성남시|광주군 돌마면]] 출신이고 집안의 선산은 [[광주시|광주군]] [[송정동(경기 광주)|광주읍]]에 있었다. 박승직의 장남 [[박두병]]과 손자 [[박용곤]]은 아예 서울에서 나고 자랐으며 그룹의 역사도 서울 종로 배오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당국이 제시한 프로야구 참여 기업의 조건에[* 당시 관계당국은 프로야구 참여 대상 기업의 조건으로 재무 상태가 탄탄한 기업, 기업의 창업지가 구단 연고지에 해당하는 기업 또는 기업 총수가 구단 연고지 출신일 경우로 한정했다. 두산 역시 당시에 OB맥주 등 네임드로 내세울 만한 계열사도 많이 갖고 있어서 재무 구조에도 별 문제가 없었다. [[삼성상회터|대구에서 사업을 시작]]한 [[삼성]]이 [[삼성 라이온즈|대구의 라이온즈 야구단]]을 맡고 [[울산광역시]] 출신의 [[신격호]]가 [[롯데 자이언츠|부산의 자이언츠 야구단]]을 맡은 것도 이 때문이다.] 딱 맞았다. 특히 프로야구 출범 당시 두산 회장이었던 박용곤은 미국 유학 시절 혼자 차를 몰고 야구 경기를 관람하고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을 구경할 정도로 상당한 야구광이었고 메이저리그 구단이 지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야구단 구단주로는 그야말로 맞춤형 타입이었다. 그러나 두산보다 먼저 서울 연고 프로야구단 창단을 추진한 곳이 있었으니 전국구 방송망을 갖춘 공영방송 [[문화방송|MBC]]였다. 1981년 창사 20주년을 맞은 [[MBC]]는 [[한국야구위원회|KBO]] 창설 이전부터 자체적인 야구단 창단을 계획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당시 [[이진희(1932)|이진희]] 사장이 "MBC만 야구단을 창단할 것이 아니라 4개 구단이 참여하는 리그를 개최하라!"라는 지시를 내려 [[MBC]] TF팀에서 구상을 마친 다음 [[청와대]]에 초기 계획을 보고했다는 기록이 있다. MBC는 1981년 10월 경에 프로야구 구단 창단 계획을 마무리지었고 마침 비슷한 시기에 [[야구]]와 [[축구]]의 프로화를 추진하던 [[청와대]] 비서실과 접촉해서 [[프로야구]] 기획안을 올린다. 이 시점에서 [[MBC]]는 이미 서울 연고지를 확정지었다. 물론 MBC에서도 두산의 프로야구 참여 의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MBC를 1순위, 두산을 2순위로 기획안에 올렸다. ||<-3> '''{{{#ffffff 청와대에 보고된 프로야구 참여 기업 기획안}}}''' || || '''지역명''' || '''1순위 기업''' || '''2순위 기업''' || || [[서울특별시|서울]] || [[문화방송]] || [[두산그룹]] || || [[부산광역시|부산]]·[[경상남도|경남]] || [[롯데그룹]] || [[LG|럭키금성그룹]] || || [[대구광역시|대구]]·[[경상북도|경북]] || [[삼성그룹]] || [[포스코|포항제철]] || || [[인천광역시|인천]]·[[경기도|경기]]·[[강원도|강원]] || [[현대그룹]] || [[한국화장품]] || || [[전라도|호남]][* 광주가 전라남도에서 분리돼 직할시로 승격된 것은 프로야구 출범 이후인 1986년이다.] || [[삼양사]] || [[금호그룹]] || || [[충청도|충청]][* 대전이 충청남도에서 분리돼 직할시로 승격된 것은 프로야구 출범 이후인 1989년이다.] || [[동아건설산업]] || [[한화그룹|한국화약그룹]] || 서울 연고팀 결정 과정은 파워의 MBC vs 정통성의 두산 싸움이었으나 당시 모든 상황은 MBC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무엇보다 MBC 경영진이 [[전두환 정부]]에 잘 보이기 위해 온갖 수를 쓰고 있었기에[* 이진희 사장은 MBC 사장 취임 일성으로 "전두환의 수호자"를 자청했을 정도로 전두환에게 잘 보이고자 노력했다. 당시 MBC는 이 사장의 지시 때문에 [[땡전뉴스]]를 비롯한 전두환 정부 편향적 프로그램의 제작에 경쟁적으로 나섰으며 이 사장은 [[MBC 청룡|MBC 프로야구단]]의 창단을 주도하는 등 친정부 행보를 이어갔다. 그 영향 때문인지 프로야구 출범 직후 '''정부 대변인''' 역할을 하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문화공보부 장관]]으로 전두환 정부에 입각하게 된다.] 당국에서도 첫 번째 서울팀의 프리미엄을 두산이 아닌 MBC에 밀어주고 싶어했다. 결국 서울 연고권은 MBC가 단독으로 가져가는 방향으로 사실상 낙점됐다. 다만 두산의 프로야구 참여 의지가 워낙 강한 만큼 어떻게든 두산을 프로야구에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때 마침 인천·경기와 충청 지역 연고팀을 맡을 기업이 비어 있었다. 대전에서 창업한 동아건설은 [[최원석(기업인)|최원석]] 당시 회장이 [[대한탁구협회]] 회장을 맡고 있어서 [[1988 서울 올림픽]] 유치에 올인하겠다면서 프로야구 참여를 완곡히 거절했다. 충청도 연고팀 모기업 2순위였던 한국화약은 [[북일고등학교 야구부|천안북일고]]라는 든든한 팜을 갖고 있었지만 1981년 7월 [[김종희]] 회장이 지병을 앓다가 유언도 없이 급작스럽게 별세하는 바람에 프로야구에 참여할 상황이 아니었다. 전라도 연고팀 기업 자리도 삼양사와 금호가 거부하면서 비었으나 [[해태제과]]가 참여 의사를 밝히면서 해결됐다. 결국 청와대는 프로야구 참여 의지가 강했던 두산을 충청도로 보내는 계획을 확정했다. 프로야구 출범의 산파 역할을 했던 [[이용일]] 초대 KBO 사무총장은 경동중학교 후배로서 막역하게 지낸 박용곤 두산 회장에게 "박 회장. 미안하게 됐소. 서울은 MBC가 맡기로 했고 인천·경기는 현대가 맡기로 했네. 아쉽지만 두산은 충청도를 맡아주는 것이 어떻겠나"라고 말했다. 당연히 박용곤 회장은 펄쩍 뛰었다. 사업을 시작하고 오너 일가가 거주하고 있는 서울도 들어갈 수 없고 창업주의 고향이자 선산이 있는 경기도조차 들어갈 수 없으며 아예 아무런 연고가 없는 충청도로 다짜고짜 내려가라고 하니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사실 두산이 원년부터 수도권에 발을 들일 가능성도 있었다. 인천·경기 지역 연고팀 1순위로 거론됐던 현대가 [[1988 서울 올림픽]] 유치에 주력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서 거부했고[*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대한체육회]] 회장 겸 서울 올림픽 유치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현대그룹의 실세 CEO였던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 [[대한수영연맹]] 회장을 맡고 있었다.] 2순위 한국화장품은 "인천 대신 서울을 연고로 하며 [[한국화장품 야구단|실업야구단]]을 그대로 프로에서 뛰게 해달라"고 했다가 퇴짜를 맞았다. 그러자 아예 프로야구 참여를 거부했다. 경인지역이 빈 자리로 남아있자 충청지역으로 낙점된 두산이 "우리 [[박승직|창업주]]께서 경기도 출신이신 만큼 두산이 인천으로 가겠소"라고 대뜸 입장을 바꿨다. 이게 현실화 되었다면 현재 인천 연고지를 가지고 있는 [[SK 와이번스]]-[[SSG 랜더스]]의 인천 SK, 인천 SSG가 아닌 인천 두산으로 부르고 있었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청와대가 나서서 "이미 두산은 충청도 담당으로 확정됐으니 가만히 있으시오. 두산이 인천으로 가면 충청도 팀을 담당할 기업을 또 찾아야 하는데 현재 상황에서는 마땅한 주인을 찾기가 어렵고 그러면 프로야구 출범 자체를 망칠 수 있으니 두산은 충청도에 남으시오"라며 두산의 앞길을 완전히 막았다. MBC에 막힌 것도 억울한데 청와대까지 나서서 두산의 수도권 진입을 완전히 막아버리니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두산이 청와대에 반기를 들자니 당시 권력자들의 힘이 너무나 강력했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참고로 당시 기업들의 상황은 어떻게든 정부 고위층의 말을 잘 들어야 하는 때였다. 그러지 않고 정부에 개기면 쥐도 새도 모르게 총수가 [[서빙고 분실|용산 서빙고의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서 [[코렁탕|콧구멍으로 설렁탕을 흡입하거나]] 기업이 아예 문을 닫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부산의 거대 목재기업이었던 [[동명목재]]가 1980년 신군부의 강탈에 의해 별안간 사라졌고 프로야구 출범 후 3년이 지난 1985년 2월에는 [[국제그룹]]이 전두환 정부에 정치자금을 제대로 헌납하지 않고 [[민주정의당]]의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지역 유세 지원에 소극적이었다는 이유로 강제 해체됐다. 그야말로 정부 말을 듣지 않는 기업은 단칼에 날려버리던 시절이었다. 때문에 두산이 서울 연고권을 주지 않는다고 당국에 개겼다가는 그룹 자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충청팀을 맡아야 할 두산이 충청과 무관한 기업이라는 문제 때문에 두산그룹 경영진이 전전긍긍했다. 결국 삼성 측에서 “우선 OB가 충청도로 갔다가 3년 후에 서울로 오면 어떻겠냐?”라는 중재안을 내놓는다. 결국 두산은 5개 구단이 공증을 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걸고 어쩔 수 없이 이 중재안을 수용하며 충청행을 선택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또 MBC가 반대했다. 이진희 MBC 사장은 "MBC는 프로야구 창설을 스스로 기획했다는 특수한 위치에 있고 이미 서울 연고권은 MBC가 단독으로 갖기로 정해져 있었는데 무슨 자격으로 1985년부터 서울을 둘로 나누냐"며 강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이러다가는 다 만들어진 야구판이 다 엎어지겠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부]]가 MBC에게 이 중재안을 받아들이도록 압박을 가했다. 당시 정부의 실세 중 한 명이던 [[이학봉]] [[민정수석비서관]]이 서울 정동 MBC 사옥으로 쳐들어가 호통을 치며 이진희 사장에게 중재안을 받아들이라고 했고 이 사장은 군말없이 도장을 찍었다. 당시 MBC도 KBS가 대주주로 있던 공영방송이었기에 없어질 가능성은 적었으나 [[언론통폐합|불과 1년 전 여러 개의 신문사와 방송사를 정부 입맛대로 강제 통폐합 시킨 전례]]가 있기에 MBC는 감히 정부의 명령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프로야구 창설에 먹구름이 끼면 MBC 사장 쯤은 손쉽게 실직자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프로야구단 창단은 진행하되 연고지는 원년부터 3년간 한시적으로 대전과 청주를 포함한 충청도 전체로 한 뒤 1985년부터 서울에 입성하는 조건을 달아 두산그룹 프로야구단을 창단하게 된다. 대신 1985년부터 서울 연고팀이 되는 만큼 원년부터 신인 드래프트에서 서울 출신 선수를 배정받았다. 사실상 최초의 드래프트라 할 수 있으며, OB가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는 통칭 2:1 드래프트라 불렀다. 왜냐면 MBC와 OB가 2:1의 비율로 선수를 지명을 했기 때문이다. 원년의 1라운드에서 [[MBC 청룡|MBC]]는 대광고 출신 [[김재박]]과[* [[대구광역시]] 출신인 김재박은 원래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경북고 측이 김재박을 별볼일 없이 바라보는 바람에 갈 곳이 없어졌다. 결국 야구부를 새로 만든 서울 대광고에 자리가 생겼고 그 학교를 나왔기에 삼성이 아닌 MBC의 지명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김재박이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것은 영남대 재학 시절부터다.] 선린상고 출신 [[이해창(1953)|이해창]] 등 두 명을 뽑고 OB는 [[박철순]] 한 명을 지명했다. 또 라운드는 알 수 없지만 실업야구의 홈런왕 [[김우열]]도 이때 OB에 뽑혔다.[* [[충청북도]] [[영동군]]이 고향이지만 서울의 선린상업고등학교(現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출신이라서 서울 연고 드래프트 대상이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김우열은 1986년 새로운 충청도 연고팀 [[빙그레 이글스]]로 이적해서 실제로 서울팀 선수로서 뛴 기간은 1년에 불과하다.] 보통 OB의 지명은 서울권에서 많이 뽑고 나머지는 전부 충청권 선수였는데 OB가 충청도로 내려가기 싫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선수 수급에 어려움이 있다는 명분이었으니[*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충청도는 야구의 불모지였다. 천안북일고의 우승을 필두로 청주 세광고, 대전고, 공주고 등이 서서히 득세하기 시작했으나 프로야구 출범기에는 충청 출신 선수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 우리나라 최초의 [[박찬호|메이저리거]]는 충청도 츨신인디 ~~] 납득이 간다. 1982년 원년 프로야구단이 탄생할 당시 다른 팀들은 일제히 구단명에 그룹명을 붙였으나 유독 두산은 그룹명이 아닌[[OB맥주|자사 맥주 제품]]인 [[OB]]를 붙여 화제가 되었다. '''두산그룹의 프로야구단 'OB BEARS''''라는 이야기다. 사실 두산그룹은 OB맥주의 인지도가 워낙 높았기에 한때 그룹명을 OB그룹으로 명명했다가 1978년에 두산그룹으로 변경했다. 20년 가까이 유지하던 OB라는 이름을 야구단에서 뗀 것은 두산그룹의 사업 구조 개편과 연관이 깊다. 두산그룹은 1998년부터 회사의 핵심 업종을 소비재 사업에서 중공업 사업으로 개편했고 이 과정에서 OB맥주의 매각을 추진했으며 야구단의 간판에서도 OB라는 이름을 과감히 내렸다.[* 결국 두산은 2003년 OB맥주를 외국 자본에 최종 매각했다.] 참고로 이런 방식으로 프로야구단 이름을 지은 사례가 한 곳 더 있는데 바로 [[빙그레 이글스]]다. 빙그레 이글스는 [[한화그룹|한국화약그룹]]이 1985년 창단한 팀으로 방위 산업체인 한국화약보다는 빙과류, 유제품, 과자제품 등을 주력으로 판매하는 소비재 계열사 [[빙그레(기업)|빙그레]]의 인지도가 더 높았기에 빙그레를 구단명에 붙였다. [[범한화가]] 내부 계열분리로 빙그레가 한화그룹에서 분리된 후 1994년 시즌부터 오늘날의 명칭인 [[한화 이글스]]로 개명했지만 빙그레 시절이나 한화 시절 모두 구단은 한화그룹의 소유이며 구단주도 여전히 [[김승연]]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